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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범 김구
2016-04-25 08:42:00
김민수
조회수   13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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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때는 나보다 중요한 사람이 없고, 나이 들면 나만큼 대단한 사람이 없으며, 늙고 나면 나보다 더 못한 사람이 없다.


 


돈에 맞춰 일하면 직업이고, 돈을 넘어 일하면 소명이다.


직업으로 일하면 월급을 받고, 소명으로 일하면 선물을 받는다.


칭찬에 익숙하면 비난에 마음이 흔들리고, 대접에 익숙하면 푸대접에 마음이 상한다.


 


문제는 익숙해져서 길들여진 내 마음이다.


집은 좁아도 같이 살 수 있지만, 사람 속이 좁으면 같이 못 산다.


 


내 힘으로 할 수 없는 일에 도전하지 않으면, 내 힘으로 갈 수 없는 곳에 이를 수 없다.


사실 나를 넘어서야 이곳을 떠나고, 나를 이겨내야 그곳에 이른다.


 


갈 만큼 갔다고 생각하는 곳에서 얼마나 더 갈 수 있는지 아무도 모르고, 참을 만큼 참았다고 생각하는 곳에서 얼마나 더 참을 수 있는지 누구도 모른다.


 


지옥을 만드는 방법은 간단하다.


가까이 있는 사람을 미워하면 된다.


 


천국을 만드는 방법도 간단하다.


가까이 있는 사람을 사랑하면 된다.


 


모든 것이 다 가까이에서 시작된다.


 


상처를 받을 것인지 말 것인지 내가 결정한다.


또 상처를 키울 것인지 말 것인지도 내가 결정한다.


그 사람 행동은 어쩔 수 없지만 반응은 언제나 내 몫이다.


 


산고를 겪어야 새 생명이 태어나고, 꽃샘추위를 겪어야 봄이 오며, 어둠이 지나야 새벽이 온다.


거칠게 말할수록 거칠어지고, 음란하게 말할수록 음란해지며, 사납게 말할수록 사나워진다.


 


결국 모든 것이 나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나를 다스려야 뜻을 이룬다.


모든 것은 내 자신에 달려 있다.


 


-백범 김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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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의 인생 역정은 다소 특이하다. 몰락한 양반의 집에서 태어나 11세에(1886) 서당에서 공부를 시작하여 17세 때(1992), 과거에 응시하나 매관매직의 실상을 보고 실망하여 새로운 인생길을 찾는다.


      


18세 때(1893), 동학의 평등주의에 감화되어 입교 접주가 되고 동학 농민군을 이끌고 농민혁명에 참여하나 실패하며 동학과도 멀어지게 된다.


     


20세 때(1895), 남만주로 건너가 의병에 참여하여 일본군을 공격하나 다시 참패하며 귀향하게 된다. 귀향하는 도중 안악의 주막에서 일본군 중위 스치다를 살해하고 체포되어 사형 선고를 받는다. 그러나 국모 살해의 원수를 갚기 위해 죽였다는 김구의 불타는 애국심과 심문하는 일본 조사관을 책망하는 그의 기개가 소문나며 세인의 주목을 받는다. 이에 감동한 고종은 일본의 반대에도 사형 직전 형집행 정지 처분을 내려 살려낸다.


      


그후 탈옥, 공주 마곡사에 은신하며 불교에 입문, 원종이라는 법명으로 1년여 승려 생활을 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내 환속하고 개화 인사들과 교류하며 교육, 계몽 운동에 힘을 쏟는 도중 새로운 종교를 만난다.


      


백범이 기독교에 접한 것은 그의 나이 27세 때(1902), 독실한 기독교인으로 황해도 은율군 장련읍 사직동에서 교육에 힘쓰던 오인형 진사 형제들을 통해서이다. 기독교에 관심을 가지고 1년여 공부한 김구는 1903년 가을, 그의 나이 28세 때에 정식으로 기독교에 입교한다. 190311, 미북장로교 선교사 헌트(한위렴)가 황해도 해주 지방을 방문해 110명의 신자들에게 세례를 주는데 백범도 그때 세례를 받은 것으로 보인다.


 



곧바로 1231일부터 2주간 동안 평양에서 열린 겨울 사경회에 참여하며 정식으로 기독교 교리와 성경을 공부하였다. 1905년 강제적으로 체결된 을사조약반대 운동이 서울 상동 교회 청년들을 중심으로 일어나는데 이 때 김구가 진남포 감리 교회 엡윗 청년회 대표로 참석한 일도 있다. 비단 김구뿐 아니라 김구 가족들도 마찬가지이다.대가 쎄기로 유명한 어머니 곽낙원 여사는 안악읍 교회에 나가며 교인들로부터 많은 도움을 입었고 부인 죄준례 역시 정신여학교를 졸업하고 교사로 일한 기독교인이었다.


 


기독교 입문 이후 백범은 그의 올곧은 성품과 민족애에 기독교 신앙과 정신이 더해져 한층 더 큰 인물이 된다.


    


1906년 풍산 서명의숙의 교사, 1907년 안악 양산 학교의 교사, 1909년 재령 보강학교의 교장, 동년, 해서 교육학회를 조직하여 학무총감의 직무를 맡고 전국 각지를 돌며 교육의 필요성과 애국심을 고취하는 일을 행한다.


     


1910년 애국비밀결사체인 신민회 비밀 회의에 참여하여 국내에서의 독립 운동뿐 아니라 해외에 군관학교를 세워 독립군을 양성하는 일을 결의하고 자금을 조달하는 임무를 맡기도 하였다.


 


19193.1운동 이후, 상해로 망명하여 임시정부 경무국장, 국무총리대리, 국무령, 국가주석등의 직무를 맡으며 항일 독립 투쟁을 지휘한다.


     


1932년 청년들을 모아 한인애국단을 조직하고 이봉창 윤봉길 투탄 의거를 일으켜 일제에 큰 충격을 주는데 이것은 국제 사회에 대한민국 독립의 문제를 인식하도록 만드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1941년 일제의 패망과 독립에 대비하여 사회주의 계열의 독립 운동 단체와 연합하여 대한민국 건국 강령을 만들었고 또한 광복군을 조직하여 대일선전포고를 하고(1941.12.9) 중국 장개석 정부와 협정을 맺고 연합군과 더불어 항일 공동 작전에 나설수 있는 기초를 만들기도 하였다(1942.7).


      


1944년에는 미군전략처(OSS)와 제휴하여 광복군특공대를 편성 국내진공작전을 계획하고 준비하였으나 일본이 전격적으로 항복함으로 그만 참전하지 못하는 일도 있었다.


 


해방이 되자 백범은 194593국내 외 동포에게 고함이라는 성명과 14개항의 임시정부당면과제를 발표하고 조속한 귀국을 서두른다.그러나 임정을 인정하지 않는 미군정의 입장으로 부득이 개인 자격으로 쓸쓸히 귀국해야 했다(1945.11.23). 그후 전국을 순회하며 자유 평등 행복의 신국가건설을 도모한다.


 


그러나 19451227,모스크바 삼상회의에서 대한민국에 대한 5년 간의 신탁 통치가 결정되고 소련의 사주를 받은 김일성이 동조하며 민족 분열의 기미가 보이기 시작한다. 남한에서도 김일성의 공산 세력에 맞서 단독 정부를 세우려는 움직임이 일어나자 백범은 이런 민족 분열 현상에 맞서 끝까지 통일된 자주 민족 국가를 세우려고 노력하였다. 그러나 1948510일 남한에서의 총선과 99일 북한의 정부 수립 선포로 민족 분열은 현실이 되고 만다.


 



이후에도 백범은 두 개의 국가가 가져올 동족상잔의 비극을 우려하며 남북 합작의 통일 국가를 위한 노력을 멈추지 않는데 이런 백범의 통일된 자주 민족 국가에의 꿈과 친일파 배격의 올곧은 신념은 그를 미워하는 사악한 이들에 의해 그쳐지고 만다. 1949629,마침 주일이었고 정동감리교회에 가려 하였으나 차편이 마련되지 못하여 숙소에서 책을 읽고 있는 도중 육군 포병 소위 안두희에 의해 피살되고 마는 것이다.


 


비록 열강들의 개입과 혼란한 국내 현실 정치에서 그의 뜻을 이루지는 못하였으나 한결같이 이 민족이 가야할 바른 길과 이상을 품고 산 백범 정신은 이러하다.


 


첫째 민족 자주 정신이다.


    


1945810일 아침 일본이 항복할 것이라는 소식을 듣고 백범은 큰 근심에 빠진다.


      


이 소식은 내게 희소식이라기 보다는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일이었다. 수년 동안 애써 참전을 준비한 일이 다 허사로 돌아가고 말았다.서안 훈련소와 부양 훈련소에서 훈련 받는 우리 청년들을 조직적,계획적으로 산둥 반도에서 미군 잠수함에 태워 본국으로 침입하게 하여..... 국내 요소에서 각종 공작을 개시하고...무기를 비행기로 운반할 것을 미육군성과 긴밀히 협력하였다.그런데 이러한 계획을 한번 실시해 보지도 못하고 왜적이 항복하였으니 지금까지 들인 정성이 아깝고 .....다가올 일이 걱정되었다.”


 


194592일 임시 정부에서 발표한 당면과제 14 개항에서 임정은 세계의 평화의 정의를 위해 싸우는 연합국 측에 대하여 매우 호의적이고 협력적인 입장을 표명한 일이 있다.


 


“2.우리 민족의 해방과 독립을 위하여 혈전한 중 미 소 영등 우방 민족으로 더불어 절실히 제휴하고 연합국 헌장에 의하여 세계 일가의 안전과 평화를 실현하는데 협조할 것


 


그러나 우리 힘으로 독립을 쟁취하지 못하고 남의 힘을 빌려 해방을 얻었으니 향후 어떻게 우리가 우리 민족의 일을 자주적으로 처리할수 있겠느냐는 열강에 대한 우려이다.


 


두 번째는 분명한 일제 식민지 유산 청산 정신이다.


 


(독립과 건국을 위한) 당면 과제 14개 항 중 식민지 유산 청산에 관련된 조항은 이러하다


 


“10.교포의 안전 및 귀국과 국내외에 거주하는 동포의 구제를 신속히 처리할 것


이것은 일제의 압제를 피해 해외로 망명하거나 일본에 끌려간 동포들에 대한 보호와 귀환을 우선적으로 처리하여야 함을 명시한 것이다.


 


“11.적의 일체 법령의 무효와 신법령의 유효를 선포하는 동시에 적의 통치 하에서 발생된 일체 벌범을 사면할 것


그러나 해방 후 미군정이 시작되며 임정은 무력화되고 우리에겐 이런 권리가 주어지지 않았다.


 


“12.적산을 몰수하고 철교를 처리하되 맹군과 협상 진행할 것


 


“14.독립 운동을 방해한 자와 매국적에 대해서는 공개적으로 막중히 처분할 것


이것은 단호하게 친일파들을 색출 처벌할 것을 명시한 것이다.


 


“13.적군에게 피박출전한 한적 군인을 국군으로 편입하되 맹군과 협상 진행할 것


어쩔수 없이 일제에 끌려가 일본제국군이 된 한국인 병사들을 국군으로 편입하고 그들의 신병 처리 문제를 연합국측과 협상하여 처리하라는 것이다.


 


세번째는 하나의 민족 국가 건설 정신이다.


 


"현시에 있어서 나의 유일한 염원은 3천만 동포와 손목잡고 통일된 조국. 독립된 조국의 건설을 위하여 공동 분투하는 것뿐이다. 이 육신을 조국이 수요(需要)한다면 당장에라도 제단에 바치겠다. 나는 통일된 조국을 건설하려다가 38선을 베고 쓰러질지언정, 일신에 구차한 안일을 위하여 단독정부를 세우는데는 협력하지 아니하겠다(삼천만동포에게 읍고함)”


 


네 번째는 자유 민주 정신이다.


 


"나의 정치 이념은 한마디로 표시하면 자유다. 우리가 세우는 나라는 자유의 나라여야 한다. 나는 어떠한 의미든지 독재 정치를 배격한다. 나는 우리 동포를 향해서 부르짖는다. 결코 독재 정치가 아니 되도록 조심하라고. 우리 동포 각개인이 십분의 언론 자유를 누려서 국민 전체의 의견대로 되는 정치를 하는 나라를 건설하자고. 일부 당파나 어떤 한 계급의 철학으로 다른 다수를 강제함이 없고, 또 현재의 우리들의 이론으로 우리 자손의 사상과 신앙의 자유를 속박함이 없는 나라와, 그러면서도 사랑의 덕과 법의 질서가 우주 자연의 법칙과 같이 준수되는 나라가 되도록 우리 나라를 건설하자고(나의 소원)."


 


다섯째는 문화 국가 건설 정신이다.


    


"나는 우리 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 가장 부강한 나라가 되기를 원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남의 침략에 가슴이 아팠으니 내 나라가 남을 침략하는 것을 원치 아니한다.오직 한없이 싸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 문화의 힘은 우리 자신을 행복하게 하고 나아가서 남에게 행복을 주었기 때문이다. 지금 인류에게 부족한 것은 무력도 아니요, 경제력도 아니다.자연 과학의 힘은 아무리 많아도 좋으나 인류전체로 보면 현재의 자연 과학만 가지고도 편안히 살아가기에 넉넉하다. 인류가 현재에 불행한 근본 이유는 인의(仁義)가 부족하고 사랑이 부족한 때문이다. 이 마음만 발달이 되면 현재의 물질력으로 20억이 다 편안히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인류의 이 정신을 배양하는 것은 오직 문화이다. 나는 우리 나라가 남의 것을 모방하는 나라가 되지 말고, 이러한 높고 새로운 문화의 근원이 되고 모범이 되기를 원한다. 그래서 진정한 세계의 평화가 우리 나라에서, 우리 나라로 말미암아서 세계에 실현되기를 원한다(나의 소원)."


 


그러나 백범의 심중에 자리한 가장 중요한 바탕은 기독교 신앙이었다. 암살 당하기 직전 그는 이런 고백을 남겼다.


 


나는 그리스도인인 고로 거짓없는 내 양심은 내 죽음을 초월하고 나라를 사랑하였습니다. 내가 만일 어떤 자의 총에 맞아 죽는다면 그것은 한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많은 열매를 맺듯 이 나라에 많은 애국자를 일으킬 것입니다. 눈물과 피로 우리들이 갈망하는 조선을 하나님의 나라로 세워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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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이문선 2016-04-26 11:08:16
나는 그리스도인인 고로 거짓없는 내 양심은 내 죽음을 초월하고 나라를 사랑하였습니다. 내가 만일 어떤 자의 총에 맞아 죽는다면 그것은 한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많은 열매를 맺듯 이 나라에 많은 애국자를 일으킬 것입니다. 눈물과 피로 우리들이 갈망하는 조선을 하나님의 나라로 세워봅시다” 좋은 긴 글 감사해요 이 시대에 더 이상 김구 선생님 같으신 분은 없을까요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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