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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론이 심합니다
2011-05-27 12:11:37
박경환
조회수   717

누구나   가지고 있는 생각과 역사관은 다릅니다.

 

심한 댓글들을 소개하면...

 






진성원 깨어있는 자, 청아짱. 앞으로 한 열흘동안 자주 보게 되겠네. 일요일엔 74연합체육대회, 다음주는 서울로(?), 6/1일엔 내가 건강검진이라 청아병원으로 간다. 잘해 줄끼제?

 

 






개뿔
그랬다. 그랬다. 맞다. 당시 80년5월이라면 윗글이 맞다. 나도 당시 5.15/5.17 서울역광장에 있었으니까...윗글은 내기준으로 보자면 80.5월부터 86년까지다. 타는 목마름으로 민주주의여 만세~만세~만세~...왕십리 뒷골막에 신새벽 울리는 그곳에서... 윗글의 정당성이 부여 될려면 86년까지다. 거기까지다. 5.18광주사태의 출발점과 그 원인을 파악하고 역사의 긍정적 영향과 부정적 영향을 봐야한다. 5.18의 가치와 부마사태의 역사적 가치의 차이점을 파악하고서야 5.18을 논해야 한다고 본다.

 

 

85년이후부터 독일신부가 직접 찍은 동영상...무자비한 진압.살인...당연히 젊은이는 피끓을수밖에 없고, 5.18의 무자비한 진압에 분노하기 마련이다. 심지어 당시 1000명이 죽었느니,,,만명이 죽었느니 유언비어가 난무했다. 과연 몇명이 죽었는가?

 

200명 안밖이다. 물론 고인이 이유여하 막론하고 유명을 달리한것에 대해선 명복을 빈다. 그 수치에는 몇년전 행불자 모두 포함이다. 내가 하고픈 말은 이것이 아니다. 이렇게 말하면 당근 탯클이 들어올수 밖에...

 

5.18폭동과 부마사태에는 역사적 평가가 달리해야 한다. 천양지차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부마사태는 갱상도 유신독재정권이 서슬 퍼렇게 살아있을때 항거한 것이고, 5.18은 부관참시일 뿐이기 때문이다. 5.18의 가장 큰 동인은 김대중 살리기와 김대중 대통령만들기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다. 5.18이 지금처럼 제대로 평가받을라면 부마사태보다 먼저 일어나야 했어야 말이되고, 유신정권이 살아있을때 5.18이 일어났다면 지금의 평가가 객관적 역사평가가 해당된다.

 

당시를 살아온 세대인 우리친구들은 모두 기억할 것이다. 5.18슬로건을 1.김대중 석방하라 2.전두환 물러가라 3.계엄철폐하라 였다. 핵심은 모인가? 5.18은 역사에 있어 과대평가 받고 있다. 그에 비하면 부마사태는 찬밥신세다.

 

진정 민주주의운동이였다면, 서슬퍼렇던 유신정권이 살아있을때 유신항거.독재종식을 외쳐야 오늘의 5.18에 합당한 평가지 않겠는가? 지금 5.18은 너무 거품이 많이 섞여 과대평가 받고 있다.그들의 운동 출발점은 슨상님이 있었기 때문이 가능했지 않는가?

 

붕괴된 유신정권에 부관참시한 것이 어찌 민주주의운동으로 과대 평가.조명받아야 한단 말인가? 이런 진실알고있는 양식있다는 역사학자 아무도 입 벙긋하지 않는다. 그들은 이런 평가를 100년후세가에 맡기는 비겁함을 보일 따름이다

 

 

 






다르마 당시 대학 1학년이었으면, 우리하고 동기네... 당시 누구 사귄 사람없나?

그런데 검색해보니 김여진이 74년생으로 나오네?

 

평소의 개뿔의 논리에 비하면 오늘의 논리는 견강부회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네. 유신정권이 쓰러졌다고 서슬퍼렇지 않았다고 하는데... 평소에 이면의 이면까지 통찰하는 개뿔의 능력으로봐서 다소 의외로 표면만 보는 논리이기 때문이다.

 

박정희가 죽었다고 서슬퍼런 독재가 사라지지도 않았고, 6개월여 보이는 탄압이 없었다고 광주 시민들이 편안하게 들고 일어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진정 모른단 말인가? 바로 증명이 되어 있지 않은가? 광주시민들이 들고 일어났다고 무자비한 폭력도 모자라서 발포까지 했는데도 서슬퍼렇지 않단 말인가? 그 당시 광주시민들은 과연 별스런 위험부담없이 봉기를 했을까? 죽음을 각오한 봉기를 그렇게 평가절하를 할 수 있단 말인가? 물론 부마항쟁도 대단한 평가를 받아야 마땅하고 제대로 대우를 받지 못한다는 개뿔의 주장에는 전적으로 동의하는 바이다. 그날(5월 18일) 새벽, 아침. 누구라도 계엄군에게 죽음으로 맞섰다면 서울사람도 부산 사람도 수백명 죽었을 것이다. 광주와 다른점은 다른곳에서는 그렇게 죽음을 각오하고 맞서지 않았을 뿐이다.

 

 

그러면 그사람들이 선상님 석방하라고 목숨을 버릴 각오로 대들었을까? ㅎㅎㅎ 너무 허황한 논리라는 생각이 들지 않은가? 한두사람도 아니고 수십만명이 적게는 수천명이 선상님 때문에 목숨을 바칠 각오를 했다고라??????????

 

그러면 그 사람들은 뭣 때문에 목숨을 걸고 대들었을까??? 그것은 선상님 때문도 아니고 전두환 때문도 아니고 민주화운동 때문도 아니다. 바로 스스로를 지키기위해서 였던 것이다. 계엄군에게 피터지게 얻어터지는, 죽어가는 가족과 이웃을 지키기위해 목숨을 건 것이다

 

때문에 당시의 광주항쟁만 두고 본다면 개뿔의 주장대로 민주화 운동이 아닐 수도 있다. 그러나 그 광주항쟁이 그후 80년대의 민주화투쟁의 뿌리였고, 전두환의 혹독한 탄압에도 투쟁을 유지하게 해서 결국은 민주화를 이루어낸 일등공신인 것이다.

 

광주항쟁이 없었더라면 80년대의 민주화운동은 전두환의 혹독한 탄압에 그 명맥을 이어 나갈수 없었을 것이며, 전두환 또한 그렇게 쉽게 물러나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광주의 원죄가 없었다면 전두환은 아마 90년대 중반 정도까지는 권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고 본다.

 

그러면 부마항쟁과 광주항쟁의 차이는 무엇일까? 그것은 당연히 수백명의 죽음이다. 부마항쟁에서도 차지철이 말대로 수백만명은 아니더라도 광주처럼 수백명이라도 죽었으면 개뿔의 야그대로 대규모 항쟁은 부마항쟁으로서 끝나고 광주항쟁은 없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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